
<이스라엘 식물 탐구 시리즈>
(2) 이스라엘의 가시나무와 그리스도의 가시면류관
“이에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위에 왕으로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 (삿9:14-15)”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요19:5)”
이스라엘의 식물들 중 가시가 있는 식물의 종이 70종 이상 자라며, 그중 20종 이상이 성경에 언급 된다. 성경 속 식물 이름 중 가시나무처럼 자주 오해되고 임의로 번역된 경우는 드물다. 성경의 인물들이 자신들의 가시식물을 구체적인 이름으로 불렀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생각해보면 오늘날에도 우리들은 가시가 있는 식물을 그냥 ‘가시나무’라고 부를 뿐 정확한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심지어 성경의 원 저자나 예언자들조차 그들이 사용한 여러 이름을 명확하게 구별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성경 속 가시 식물에 대한 스무 가지 이름을 실제 식물 스무 종에 대입하려는 학문적 노력은 오류와 실패로 끝났다.
히브리어로 가시는 코츠(קוץ) 그리고 가시 나무는 아타드(אטד)라고 주로 번역된다. 위의 사사기에서 나오는 가시나무는 아타드로 번역되었고 요한복음에서 가시는 코츠로 번역되었다. 아타드는 창세기 50장 10, 11절에는 지명 (한국어 번역: 아닷)으로도 등장한다. 이 아타드가 어떤 식물인지에 대해 많은 갑론을박들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후보로는 지지푸스 스피나-크리스티(Ziziphus spina-christi) 다른 말로 지지푸스 로투스(Ziziphus lotus)로 거론된다. 그 이유는 이 식물들이 이스라엘 북부, 특히 사마리아 평야 동쪽 경사면에 흔하게 발견되는데, 이는 요담이 사사기에서 ‘나무들의 우화’를 사람들에게 전한 장소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사사기에서는 세겜이라고 나오는데 이는 현재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나블루스’이며 옛 사마리아 땅이다). 지지푸스는 한국의 대추나무 정도로 생각하면 되고, 열매는 시장에서도 종종 판매된다. (주의-대추야자와는 다른 식물이다!!) 하지만 무화과, 감람나무(올리브) 보다 상품성이 덜하며 이는 사사기의 ‘나무들의 우화’의 맥락과 일치한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학자들은 이 대추나무를 ‘아타드’라고 보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 면류관은 어떤 가시나무로 만들어졌을까? 예루살렘에는 가시가 있는 식물 종이 적어도 12종 이상 자란다. 그중 사르코포테리움 스피노숨(Sarcopoterium spinosum), 즉 ‘작은 가시 떨기나무’는 매우 흔하며, 학자들은 그 식물이 가시관을 만들 때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한다. 이 나무는 장미과 식물이라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기독교 전통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지지푸스를 ‘가시관’으로 보고 있으며, 예루살렘에서 이를 고집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모리아 산(성전산) 동쪽 경사면에 이를 보존하여 기념하고 있다. 지지푸스 나무는 최대 10미터 높이까지 자라는 상록수로, 가지가 넓고 복잡하게 얽힌 타원형의 왕관 모양으로 자란다. (아마 이 때문에 현지인들이 가시면류관이 지지푸스일거라고 추측하는 것으로 보인다.) 잎은 타원형으로 가장 자리에 톱니가 있으며, 길이는 3-5cm, 너비는 약 2cm이다. 두 개의 가시가 달린 턱잎이 있으며, 하나는 곧고 다른 하나는 갈고리 모양이다. 이 나무는 거의 일 년 내내 꽃을 피우지만, 여름에 가장 많이 개화한다.
예전에 예루살렘 시티홀 트램역을 지나다가 한 유대인으로부터 가룟유다가 목을 맨 나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시티홀 역에서 마밀라 거리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큰 나무 한그루가 있는데 전승에 의하면 이 나무가 가룟유다가 목을 맨 나무라고 한다. 이전에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이 거리를 지났지만, 왠지 지금은 그 나무가 눈에 자주 밟힌다. 사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면류관이 대추나무인지, 장미가시인지 큰 의미는 없다. 위에서 말한 작은 가시 떨기나무는 예루살렘에서 정말 쉽게 볼 수 있는 나무이다. 이전에는 그냥 지나쳤던 이 장미과 식물이 이제는 볼 때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떠오르며 저절로 마음이 겸허해질 때가 있다. 또한 울퉁불퉁 나이있는 가시를 실제로 만져보며 얼마나 우리 주님께서 아프셨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라는 김춘수 시인의 시처럼, 의미 없이 지나치던 일상 중 하나가 때로는 남다른 의미로 다가올 때도 있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