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라

예루살렘의 평화를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시편 122장 6절을 통해 우리에게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고 요청하신다. 또한 예레미야 29장 7절에도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이 평안하기를 구하고 그것을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의 평화 가운데서 너희도 평안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라라고 분명하게 요구하는 구절이 많지 않지만 특이하게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고 또 예루살렘의 평화와 우리의 평화가 연결되어 있음을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은 이스라엘인들에게만 말하는 구절이 아닌 모든 주님의 자녀들에게 하는 말씀이다. 성경에는 600번이상 예루살렘에 대해서 언급되어 있으며, 신구약을 통틀어 하나님의 성, 하나님의 보좌와 같은 표현을 사용한 성읍은 예루살렘뿐이다.

이렇게 성경은 이 세상 창조물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예루살렘에 대해서 특별하게 설명하고 있기에 예루살렘은 늘 십계명의 두번째 계명과 같이 예루살렘 자체가 하나님을 대신하거나 하나님께 갈수 있는 신비로운 매개체, 즉 우상이 되는 현상은 역사속에서 지속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물리적 장소 자체가 신앙의 초점이 되는 방향으로 예루살렘을 해석하고 적용하는것을 경계 해야함을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명시하고 계시고, 역사속에서 예루살렘자체를 우상화했을때 발생한 수많은 비극이 수천년 예루살렘의 역사이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바라볼때는 예루살렘에 대한 신비주의를 경계하는 동시에 성경에서 예루살렘을 통해 분명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신비, 즉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계획과 경륜을 인정하는 마음도 중요하다.

<예루살렘의 의미>
평화는 죄의 저주 아래 있는 모든 피조물과 모든 도시에 필요한 주제다.
역사학자에 의하면 3500년의 인류 역사중 전쟁이 없던 시기는 총 270년에 불과하다라고 말한다. 즉 인류는 늘 서로를 죽이는 최악의 선택인 전쟁을 끝없이 했고 지금도 지속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의 회복과 평화를 원하시고 주님의 자녀들에게도 이러한 긍휼의 마음을 원하신다. 또한 성경은 분명하게 예루살렘을 지명하여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그러면 예루살렘은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는가? 하나님의 계획을 인간이 다 모르지만 한가지 분명한것은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진리를 선포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수천년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선포하고 있다.
예루살렘 또한 수천년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하나님만이 역사의 주인이시며 역사의 시작과 끝을 정하고 운행하시는 분임을 선포하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물리적 공간이다.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예루살렘으로 주님의 사람을 부르시고 주님의 뜻을 선포하신다. 이러한 현상은 바벨도시의 반란이후 아브라함에서 시작해서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성경에 분명하게 드러나는 예루살렘을 통한 하나님 계획 시작은 창세기 22장이다. 아브라함에게 모리아산에서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시험을 통해 장차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적 사건을 보여주셨다. 이 시험 이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3가지 축복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설명하셨다.
너의 씨가 하늘의 별들과 바닷가의 모래처럼 번성할것이며, 네 씨가 원수의 문을 차지하리라는것이고 마지막으로 네 씨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얻는것이다.
간단하게 요약하며 먼저 믿음의 후손들, 주님께 속한 자들이 아주 많아질것이라는 것이고, 그렇게 많아진 주님의 사람들이 원수의 문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사람들로 모든 민족이 복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창세기 3장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원형복음을 통해 온 인류와 역사전체에 선포하는 영적 전쟁의 구체적인 양상을 잘 설명하고 있다.

이후 시편 24편을 통해 다윗을 통해 예루살렘에 대해서 주의 산, 예루살렘에 오를자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어라, 너희 영원한 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그리하면 영광의 왕, 만군의 주께서 들어오시리라라고 선포하고 있있다. 아브라함과 다윗을 통해서 예루살렘과 연결된 집중할 만한 부분은 영적전쟁과 문에 대한 부분이다.

특히 창세기 22장에서 원수의 문들을 차지할것이라는 특이한 구절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와 유사한 표현이 마태복음 16장에 등장하는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메시야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포한이후 이 반석위에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교회를 세우시고, 지옥의 문들을 이기는 권세가 교회에게 있다고 말씀하셨다. 또 내가 천국의 열쇠들을 교회에게 주시고, 묶고 풀수 있는 권세를 교회에게 주셨다. 이 축복은 창세기 22장에서 말씀하신 내용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수 있다. 성령이 예루살렘에 임하시고 교회의 역사는 시작되었고, 교회는 천국의 비밀과 같이 하늘의 별과 해변의 모래처럼 점점 커져갔다. 그리고 지옥의 문을 이기는 권세를 가졌으며 결국 모든 민족에 복음이 선포되는 핵심은 모든 민족에 주님의 몸이며 신부이며 하나님의 임재가 거하시는 성전인 교회가 세워지는것이다. 즉 모든 민족에 개척된 교회를 통해서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는다는 축복과 연결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원수들의 문들을 차지하고, 지옥의 문들을 차지하는것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부분은 시편 24편의 문들아 머리들어라 영광의 왕이 들어가신다라는 선포를 통해 예루살렘과 연결된것임을 알수 있다. 물론 성경은 처음부터 역사의 시작은 영적전쟁을 선포하고 있는데, 그 영적 전쟁의 끝은 영광의 왕, 만군의 주가 예루살렘의 평화의 왕으로 임하는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예루살렘의 운명>
예루살렘의 운명은 모순적이며 역설적이다. 축복과 저주가 공존하며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의 영적 전쟁이 동시에 움직이고 있다. 이 구조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 필연적 비극적 역사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러한 예루살렘의 고통스러운 운명에 대해서 2천년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며 안타까워 우시면서 잘 설명하고 계시다.

스가랴(스가랴 9장 9절)를 통해 예루살렘의 고통과 슬픔 저주의 운명에서 해방시킬 공의와 구원을 가지고 올 시온의 왕, 예루살렘의 왕 예수님께서 겸손하게 어린 나귀를 타고 2천년전 예루살렘성벽의 동쪽에 있는 동문(황금분, 수산문으로도 불림)으로 입성하셨다.
동문은 지금도 예루살렘 8개문중 유일하게 폐쇄된 문이다. 동문은 에스겔 43장 1-5절의 환상중에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갔으며 동시에 에스겔 44장 1-3절과 같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그곳을 통해 들어갔기에 그 대문은 닫혀 있으리라 예언과 같이 다친 문이다.

초림하신 메시아 예수님이 동문을 통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때 제자들와 많은 이들이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는 이여”라고 외쳤다. 이 선포는 시편 118장 26절에 나오는 구절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메시야를 환영하는 예언적 구절이다. 이 선포에 대해서 바리세인들이 예수님께 꾸짖어 달라고 요청하자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이 침묵한다면 돌들이 즉시 소리를 외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메시야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때 반드시 이 고백이 선포되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보시며 울며 예루살렘이 평화에 속한 일들을 알았으면 좋았을텐데 이제는 그것들이 눈에 가리워졌다고 한탄하셨다. 그리고 이후에 예루살렘에 임할 재앙을 말씀하시며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감찰하시는 때를 몰랐기 때문이라고 슬퍼하셨다.

<두려움과 평화>
예루살렘의 운명은 결국 예루살렘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황폐함은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결과이다. 그리고 전쟁과 분쟁은 사실 불순종에서 기인한 죄가 근원이다. 그리고 죄를 지은 인간들의 가장 근본적인 반응은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은 창세기 3장 10절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나 벌거벗었으므로 두려워 숨었나이다” 이 구절과 같이 인간이 최초의 불순종의 결과, 죄로 인해 처음으로 느낀 감정이었고 반응이었다.

예루살렘의 비극이 끝나고 샬롬이 임하기 위해선 이 두려움의 문제,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두려움에서 해방되기 위해선 두려움을 피해서 숨는다고 해결할수 없다.
또 자기 암시를 통해서 두려움이 없다고 포장한다고 두려움이 없어지지 못한다.
강함으로 두려움을 이길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 이것은 더욱 두려워하고 있음을 스스로 속이는 자기 기만일뿐이다.
값싸고 일시적인 신비적인 방법으로 두려움을 이긴것 같은 착각을 가지게 할수 있으나 이것은 마약과 같이 일시적이며 중독적인 방법이어서 어두움이 자라는 양분이 되어 아무것도 못하는 노예로 만들 뿐이다.
두려움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하게 우리 마음 심연에서부터 문득 흘러나오는 우리의 본연의 모습이며 인간역사를 움직이는 근원적 어둠의 힘과 같다.

이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방법은 오직 한가지외에는 없다.
평화의 왕 예수님께서 어두움과 두려움이 가득한 우리 가운데 오시는것이다. 어떤 어둠도 두려움도 없이 죄의 권세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완전히 승리하신 메시야(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의 문을 열고 들어오실때 비로서 가능한것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마누엘, 평화의 왕 메시아 예슈아가 우리가운데 거할때 두려움과 어둠은 사라지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는것을 목격한 제자들이 두려움으로 문들을 잠구고 어쩔줄 몰라하실때 제자들을 두려움에서 해방시키신 방법은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의 가운데 오셔서 처음으로 샬롬을 선포하셨고,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죽으시고 부활하신 메시야임을 선포하신것이었다.

<주님의 때, 주님의 이름>
샬롬과 완전함은 단어와 내용이 같은 뿌리에 있다. 완전한 하나님의 창조는 하루만에 이루어지지 않고 7일이라는 하나님의 때에 창조는 완성되었고, 이 완전한 상태가 바로 샬롬은 상태이다.
동일하게 예루살렘의 샬롬 또한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방법을 즉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있다.
결국 예루살렘의 평화는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짐을 알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방법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 성경에서 말하는 중요한 포인트가 있는데 이것은 마태복음 23장 37절-39절에서 예수님의 예루살렘에 대한 예언에서 잘 드러난다. 이 구절엔 예루살렘의 황폐함과 버려짐이 끝나는 중요한 때와 조건이 나온다. 이는 예루살렘이 “찬송하리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는 독특한 고백을 하는 때라고 말하고 있다.
이 고백은 2천년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할때 제자들의 무리들이 외친 선포이며 다시오실 예수님을 환영하는 선포이다.
그런데 이 고백은 시편 118편에 나오는 예언적 선포인데, 이 선포에는 특이한 표현이 나오는데 바로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라는 표현이다. 신약,구약 모두 정확한 표현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라는 표현이다. 여기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메시야의 중요한 특징을 말하고 있고, 여기서 집중할 만한 표현이 여호와의 이름이다.

여호와의 이름이란 표현이 처음 성경에 나오는것은 가인과 아벨, 형제살인사건 이후 아벨이 죽임당하고 하나님이 다시 셋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시작하고 창세기 4장 26절에 셋이 다시 아들을 낳은때 즉 축복의 역사가 연결되는 때부터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주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불순종과 이로인해 두려움과 죄로 말미암는 저주의 역사가 시작되고 예배의 실패로 정체성마저 잃어버린 인간이 회복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시작은 의외로 참 간단하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것에 너무 익숙해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하지 못할때가 많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주의 이름이 매우 중요한 구절에 나오는것을 알수 있다, 예를 들어 예루살렘의 운명을 이야기하시며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할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고,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선포하고 계신다.

아주 특이하게 이스라엘에서 유일하게 부르지 않는 이름이 2개가 있는데, 바로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의 이름을 이스라엘에서는 부르지 않는다.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을 경솔하게 부르지 말라는 십계명중 3번째 명령(출애굽기 20장 7절)때문에 이스라엘에서는 여호와라는 단어가 나오면 주님이라는 히브리어 표현 ‘아도나이’로 읽는다. 그래서 아무도 하나님의 진짜 이름이 야훼인지 여호와인지 모르게 되었다.
두번째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의 이름 예슈아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예슈아의 이름대신 저주의 이름으로 바꾸어서 지금도 모든 이스라엘 사회에선 예수님의 이름을 대신하고 있다.

잠언 30:3-4절을 보면 “하늘에 올라가셨다가 내려오신 분이 누구신가? 바람을 자기의 주먹 안에다 모으시는 분이 누구신가? 옷으로 물들을 싸매신 분이 누구신가? 땅의 모든 끝들을 정해 놓으신 분이 누구신가? 그 분의 이름은 무엇이며, 그 분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네가 말할 수 있느냐?”

어쩌면 잠언의 30장의 기자인 아굴의 질문을 지금 예루살렘에게 하고 있는것 같다.
그리고 예루살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이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것은 단순히 주술적의미로 예슈아의 이름을 부르는것이 아닌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온맘으로 초청함을 이야기한다.

<샬롬 예루살렘>
예루살렘은 축복의 역사가 시작한 곳이며 동시에 저주의 역사도 함께 시작된 곳이다.
축복과 저주의 역사가 충돌하는 영적전쟁의 마지막이 예루살렘이다.
역사에는 문 혹은 자물쇠와 같은 핵심이 있다.
하나님의 역사 전진에는 늘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주님의 사람들의 순종이라는 2가지가 함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것은 하나님께 달렸다고 생각하는 운명주의를 배격하며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모두 성취할수 있다는 메시아적 신드롬에서 벗어나 늘 겸손히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며 또한 우리의 순종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사모하며 달려가야한다.

평화의 왕 예수님은 문을 부수거나 담을 뛰어 넘어 도둑처럼 오지 않으신다.
그분은 문을 통해 들어오신다. 문을 통하지 않고 벽을 부수고 들어오거나 벽을 넘어 갑자기 들어오는것은 폭력이며 강압이다. 폭력과 강압의 방법은 대상의 인격과 정체성을 파괴하며 부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강력한 폭력의 방법으로 전쟁이 없는 고요한 상태를 만들수 있다. 하지만 이는 대상이 소멸된 초토화를 통한 평화일뿐이며 사실 더 큰 힘에 의한 휴전일뿐이다.

평화의 왕 예수님은 인격적으로 문을 통해서 예루살렘에 평강의 왕으로 입성하기 원하신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에게 원수의 문을 차지하고, 교회에게 지옥의 문을 지키는 권세를 주셨다.
이것이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는 요청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평화가 임하는것은 마치 거대한 역사의 자물쇠가 열리는 것이며, 전역사 전세계 영적전쟁의 마지막 승리의 문이 열리는것이다.

예루살렘 가운데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이 오셔야 하는데, 그것을 위해선 찬송하리라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라는 선포가 있어야 한다.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모든 믿음의 자녀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예루살렘에 진정한 예배가 회복되며 이땅 구석구석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예슈아의 이름이 높여지고 그분의 이름이 찬송을 받아지는것이다. 이 모든것이 가능하기 위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것처럼 땅에서 이루어지길 위해 기도하는 의인들의 기도(야고보서 5장 16-18절)가 필요하다.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민족에 진정한 정체성이 회복되고 주안에서 회복된 정체성으로 진정한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볼때 결국 예루살렘이 주님을 볼수 있다.

파수꾼들의 역할은 분명하다. 성을 지키는 이들인데 결국 문을 열고 닫는 권세를 가진 이들이다. 깊은 두려움에 단단히 닫힌 예루살렘은 그 마음의 문을 닫고 있다. 사단도 평강의 왕 예수님은 반드시 문을 통해 들어오시는 인격적인 분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문을 봉쇄하고 문을 지키고 있다. 예루살렘을 운명을 보시고 통곡하신 예수님은 고통의 시간을 넘어 슬픔의 골짜기를 지나 예루살렘의 평화의 왕으로 들어가길 오래 기다리고 계신다. 그래서 우리는 다윗처럼 외쳐야 한다. “찬송하리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이여”.
문들아 너의 머리를 들지어다. 영광의 예수그리스도께서 들어가신다.”

그날이 오기까지 예루살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원하는 모든 파수꾼들이여,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 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